▶ 대한독립단. 대한광복군
3·1운동이 실패하자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단체대표와 의병계열의 인사 560여 명이 1919년 4월 15일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본부는 류허현에 두고, 각 현에는 지단·분단 등을 설치하였다. 국내외에 100여개의 지부를 설치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19년 9월 단원 20명이 함경북도 갑산 동인면 금정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으며, 1920년에는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였다. 3월에는 평안북도 벽동군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4월에는 영유군에서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5∼7월에는 평안북도 철산·삭주·강계·벽동 등지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9월에는 의주·운산·영변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특히 독립군 파견대장 이명서는 8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8월 15일 밤 은율군의 친일파 군수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9월 10일 일본군의 반격을 받은 독립군은 이명서를 비롯하여 6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남은 대원은 중상을 입었다. 태천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 등이 의용대를 조직하고, 폭약을 구입, 관공서 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김병연·박기연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자금을 모금하고 안도·무송현 등지와 연락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1920년에 한족회·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고, 1922년 유하현에서 한족회·광한단 등 독립운동단체들과 회합, 대한광복군을 조직하고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