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의 동생 이봉희는 대한협회안동지회의 중임을 맡아 협동학교를 비롯한 애국계몽운동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으며 이상룡을 따라 만주로 건너간 후에는 경학사, 부민단, 신흥강습소 활동 등 석주 이상룡과 함께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에 서서 활동했다.
특히 3.1 운동 후 한족회와 서로군정서가 설립되면서 독립운동기관이 제대로 틀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한족회는 한인 동포사회를 통솔하는 자치정부와 같은 기능을 가지면서 중국 정부와 교섭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때 이봉희는 교섭자로 파견되어 적극적으로 끈질기게 중국 정부를 설득하여 농토개척권을 허가받아 동포들의 생활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